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프란츠 콘라트 폰 회첸도르프 (문단 편집) ===== 갈리치아 전투, 바르샤바 전투 ===== [[1914년]] [[8월 26일]], 제국군 제3군은 [[러시아 제국군]]의 제5군을 공격했다. 이후 이어진 코마로프(Komarów) 전투는 브루더만에게 있어서 재앙과도 같은 것이었다. [[알렉세이 브루실로프]]의 선봉 부대가 제3군을 공격해올 때까지만 해도 브루더만은 이들 바로 뒤에 러시아군의 본대가 따라오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이날 브루더만은 군단 간의 작전 조율이나 포병 사격 계획도 없이 2개 보병 군단을 동원해 마구잡이로 반격에 나섰지만 격퇴당하고 말았다. 러시아군이 지나치게 신중한 움직임을 보이면서 제국군은 전선의 붕괴라는 최악의 사태는 모면했지만, 총 35만 명에 이르는 제국군 병사들이 전사하거나 부상당하거나 포로가 되었으며, 이는 전체 제국군 전력의 반에 해당하는 규모였다. 이뿐만 아니라 15만 명의 제국군이 집결해 있던 프셰미실(Przemysl) 요새까지 러시아군에게 포위당하게 되었고, 밀리던 제국군은 [[9월 16일]] 무렵 두나예츠(Dunajec)강 건너편으로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제국군 제1군과 제4의 측면을 보호하는 임무를 위해 배치된 제3군을 지원하는 부대는 제3군 남쪽과 서쪽에 배치된 무장이 가벼운 [[헤르만 쾨베스 폰 쾨베샤자]] 중장이 이끄는 제3군소속 제3군단과 제12군단뿐이었다. 갈리치아 전투는 제국군의 결점을 극명하게 보여준 전투였다. [[헬무트 요하네스 루트비히 폰 몰트케]] 장군은 [[독일 제국군]]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의 전선을 보강해야 한다는 의견을 냈다. 팔켄하인은 그의 의견을 지지했지만 가능하면 서부전선의 독일군 부대를 동원하지 않고 달성하기를 원했다. [[9월 16일]] 독일 제국군은 [[파울 폰 힌덴부르크]]를 사령관으로 하는 제9군을 창설하였다.[* 원래 제9군의 사령관은 리하르트 폰 슈베르트(Richard von Schubert) 포병대장이었으나, 오헝군의 지휘를 받기 싫었던 독일군은 오헝군의 장성 계급중에 [[상급대장]]이 없다는걸 이용해서 [[파울 폰 힌덴부르크]] 상급대장을 제9군의 사령관으로 임명하는 꼼수를 썼다. 오헝군에는 없는 계급이지만 명목상 병과대장보다는 한단계 높은 직급이기 때문에 이를 구실로 동맹군의 지휘권 확보에 유리한 위치를 점할 수 있었다. 허나 오헝군도 얼마안가 [[상급대장]] 계급을 본격적으로 도입하기에 이르렀다.] 이틀 후, 제9군 참모장 [[에리히 루덴도르프]]는 향후 작전 방향을 논의하기 위해 콘라트와 회동했다. 그러나 콘라트는 제국군을 독일 제국군의 지휘하에 편입시킨다는 제안을 거부했고, 루덴도르프도 굳이 자신의 주장을 끝까지 관철시키려 하지 않았다. 제국군은 재정비를 하기 위한 여유가 필요하며 이러한 여유를 줄 수 있는 것은 독일 제9군뿐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던 루덴도르프는 어차피 콘라트와 만나러 가기 전에 이미 적절한 명령들을 내려놓은 상태였다. [[9월 29일]], 독일 제9군은 러시아군을 바르샤바와 이반고로드(Ivangorod)[* 오늘날의 데블린(Deblin)] 사이의 [[비스와 강|비스툴라강]] 상류로 밀어내기 위해 진격하기 시작했다. 루덴도르프의 의도는 독일 제국군의 공격을 통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에 대한 러시아군의 압력을 약화시킴으로써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이 공세를 재개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러시아군이 독일 제국군 전선으로 병력을 집중시키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은 [[10월 4일]], 전면에 있는 러시아군이 단순한 견제 부대임을 파악하고 산(San)강으로 진격하여 [[10월 9일]]에는 고립된 프셰미실 요새의 포위를 푸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이후 러시아군의 저항이 격화되면서 제국군의 진격은 정지되고 말았다. 독일 제9군 좌익은 [[아우구스트 폰 마켄젠]]이 지휘하고 있었는데, 바르샤바 방면으로부터 러시아군에게 공격당할 위기에 처해있었는데다. 독일이 받는 압박을 줄이려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이 공세에 나서줘야만 했다. 그러나 콘라트는 공세에 나가는 것을 거부했고, 그렇다면 최소한 마켄젠을 도와주기 위해 병력을 북쪽으로 급파해달라는 루덴도르프의 대안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일이 이 지경에 이르자 독일 황제 [[빌헬름 2세]]가 프란츠 요제프 1세에게 요청하였지만 프란츠 요제프 1세는 콘라트의 방침을 옹호했다. 하지만 타협책으로 제국군이 독일의 근위예비군단이 맡은 이반고로드 전선을 인수하자, 그 병력을 북쪽으로 돌릴 수 있었다. 하지만 러시아군의 공격으로 인해 포위당하는 사태를 피하려던 루덴도르프는 마켄젠에게 퇴각을 명령했다. 독일은 동맹국을 돕기 보다는 전력을 보존하는 것이 우선이었기 때문에, 제국군은 러시아군의 공세에 혼자 힘으로 알아서 대처해야 했다. 결국 제국군 제1군도 포위당하지 않기 위해 서둘러 퇴각해야만 했다. 10월 말, 러시아군의 보급 물자가 다 떨어지면서 제1차 바르샤바 전투는 끝이 났다. 독일군은 초반에 얻은 이득을 모두 잃어버렸고, 제국군은 더 많은 영토를 상실했으며, 프셰미실은 다시 한 번 러시아군에게 포위당했다. 러시아군은 베를린 공세를 시도했지만 좌절되었고, 이에 대하 반동으로 러시아군 지휘부에서는 제국군을 쳐서 독일군의 '부드러운 아랫배'에 칼을 꽂자는 주장이 힘을 얻기 시작했다. 그러는 사이 마켄젠을 지원하기 위해 콘라트가 [[11월 18일]]부터 [[크라쿠프|크라카우]]에서 북쪽으로 공격을 시작했다. 그러나 [[우치(폴란드)|우치]]와 크라카우 전선에서 러시아군이 예상외로 강하게 저항하면서 제국군은 러시아군을 포위하거나 비스툴라강 선으로 쫓아낸다는 목표를 달성할 수 없었다. 한편 제국군이 공격을 위해 전력을 북방에 집중하자 상대적으로 크라카우 동쪽 전선에 대한 방비는 크게 약화되었다. 콘라트는 이 지역에 대한 수비를 [[스베토자르 보로예비치 폰 보이나|보로예비치]] 보병대장의 제3군 소속 11개 사단과 크라카우 남쪽에서 급하게 편성된 몇 개 사단에게 맡겨놓은 상태였지만, 급편된 이들 부대들의 전력이 시원치 않다는 사실은 누가 봐도 분명했다. 러시아군 총사령부는 이러한 정황을 파악하자마자 병력을 동원해 공격에 나섰고, 브루실로프의 공격은 매우 성공적으로 진행되어 [[카르파티아 산맥]]을 넘어 헝가리의 대평원 지대 부근에까지 도달했다. 그러나 당시 러시아군은 광대한 전선에 배치된 대규모 부대들의 움직임을 조율하는 데 상당한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그래서 또다른 공세에 나섰는데, 크라카우를 공격하는 동시에 카르파티아 산맥 일대에서 계속 압박을 가하여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이 크라카우 지원에 나서지 못하도록 하였다. [[비스와 강|비스툴라강]]과 카르파티아 산맥 사이에 배치된 콘라트의 4개 군은 이미 전력이 상당히 저하된 상태였다. 또 브루실로프가 거의 헝가리까지 밀고 들어옴에 따라 이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심장부가 위협을 받게 되었다. 이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콘라트는 [[요제프 페르디난트 폰 외스터라이히토스카나|요제프 페르디난트 대공]]이 지휘하는 제4군의 일부 부대와 완편된 독일군 1개 사단을 크라카우로부터 남쪽으로 파견하여 제3군의 좌익을 보강했다. 제국군은 이런 움직임으로 러시아군을 공격하였고, 이를 지원하기 위해 브루실로프가 제국군을 포위하려 했지만,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12월 8일]], 제국군 제3군이 공격을 개시하여 카르파티아 산맥의 핵심 통로들을 점령하자 브루실로프의 헝가리 진격은 다시 한 번 좌절되고 말았다. 러시아군은 큰 피해를 입고 퇴각했으며,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이 보기보다 만만한 상대가 아니라는 뼈아픈 교훈을 얻게 되었다. 결국 러시아군 내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을 먼저 때려눕히자는 주장을 힘을 잃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도 그 후 두 번 다시 그와 같은 선전을 보여주지 못했다. [[1915년]] [[1월 1일]], 팔켄하인은 베를린에서 콘라트 및 루덴도르프와 회동했다. 1주일 후 [[빌헬름 2세]]와 [[테오발트 폰 베트만홀베크|베트만홀베크]]의 압력에 팔켄하인은 마지못해 동부전선의 독일군 사단 몇 개를 카르파티아 산맥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을 지원하기 위해 파견한다는 데 동의했다. 한편, 러시아군 지휘부에서는 전략적 우선순위를 놓고 갈등이 벌어지고 있었다. 독일을 상대로 승리하기 어려우니 오스트리아-헝가리를 먼저 공격하여 확실하게 패배시키고 이탈리아와 루마니아의 참전을 유도하자는 것과, 주적은 독일인데 오스트리아-헝가리 전선에 병력을 투입하는 것은 전력 낭비라며 의견이 갈리고 있었다. 결과는 독일 전선에 집중하기로 하면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은 한숨 돌리게 되었다. 10만 명 이상의 제국군이 프셰미실 요새에 틀어박혀 있었다. 러시아군 반년 가까이 지나도록 요새를 함락하지 못하였다. 러시아군은 카르파티아 산맥을 넘어 헝가리를 공격한다는 계획을 고집하고 있었는데, 콘라트 역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이 카르파티아 산맥으로부터 러시아군에게 공세를 가할 경우 비스툴라강에서 러시아군을 몰아내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런 판단하에 양측 모두 카르파티아 산맥 동부지역에 대한 동계 공세를 준비했다. 그러나 산악 지형에서 동계 공세를 펼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카르파티아 산맥의 산들은 고도가 높지는 않았지만 매우 가파른 산비탈을 이루고 있었다. 이런 산들을 넘어갈 수 있는 유일한 통로인 고개들도 극소수에 불과했고, 쓸 만한 도로는 더더욱 없었다. 그리고 이런 고개들조차 겨울에는 대부분 눈으로 막혀 버리기 일쑤였고, [[라스푸티차|날씨가 풀릴 때는 진창을 이루면서 사람과 마차의 통행이 불가능한 경우가 다반사였다]]. 이런 조건하에서도 공격을 고집한 콘라트에 의해 그 해 겨울, 수천 명이나 되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이 카르파티아의 험한 산속에서 [[동사|동장군의 무자비한 손길에 죽음을 당해야 했다.]] 하지만 브루실로프의 제8군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의 공격을 끈질기게 방어하자, 결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은 제풀에 지쳐 [[1월 26일]] 공세를 중지할 수밖에 없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의 공격이 중지되자, 브루실로프는 바로 반격에 나서면서 보로예비치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 제3군에게 큰 타격을 주었다. 혹독한 겨울 속에서 이어진 3주간의 전투에서 제3군은 전체 병력 10만여 명 가운데 6만 5000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2월 27일]], 콘라트의 두 번째 공세 역시 제한된 성과만을 거둔 채 끝이 났지만, 러시아군을 드네스트르강 동쪽으로 밀어내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3월 22일]], 프셰미실 요새가 러시아군에게 함락되었고, 10만 명의 포로를 획득하였다. 러시아군은 카르파티아 산맥을 넘어 다시 한 번 공세를 시작했다. 그러나 콘라트는 러시아군이 평야지대에 대규모로 쏟아져 나올 것에 대비해 [[빈(오스트리아)|빈]]과 [[부다페스트]] 사이의 도나우강 선의 방어진지를 강화했다. 게다가 러시아의 포탄이 고갈되어 버리면서 러시아군의 공격이 잠시 주춤해졌고, 독일의 증원 부대가 도착하면서 전선은 다시 안정되었다. 하지만 이때까지 누적된 피해로 인해 이제 제국군에는 제대로 훈련된 일반 장교들과 부사관들을 찾아보기가 힘들 지경이 되어버렸다. 러시아군도 별반 사정이 좋을 것은 없었지만, 그대로 만약 이런 추세가 지속된다면 러시아군 지휘관들의 야망이 마침내 실현될 수도 있을 것처럼 보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